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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백제문화의 터전 부여!

성왕

백제 중흥의 영주 성왕

성왕은 무령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명농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에 결단성이 있었다. 그래서 무령왕이 523년 죽자 그 뒤를 이어 백제왕이 된 인물이다.

오랜 백제의 역사중에 성왕만큼 파란만장한 역정을 보낸 인물도 적다. 그는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다음, 북으로 고구려에 침탈당한 영토를 회복하는가 하면, 제 2의 도약을 위해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는 대역사를 단행하였고, 국가의 통치제도를 새롭게 정비하여 백제가 명실상부한 국가로서의 면모를 완비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개인적 으로 불교에 대한 돈독한 신앙심을 가졌기에 사찰 창건과 불경 번역, 불교문화의 교류에 특히 앞장섰고, 이로써 백제가 나름의 독특한 문화기반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군주이기도 하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이르면 백제의 무덤으로는 가장 유명한 무령왕릉이 있다. 무령왕릉은 벽돌로 만든 특이한 형태의 무덤으로 성왕이 부친인 무령왕을 위해 만든 것이다. 520년, 20여 년간 재위하면서 웅진에 도읍한 후 끊임없이 되풀이되던 정쟁(政爭)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무령왕이 나이 62세가 되어 생을 마감하니, 아들인 성왕이 부왕인 무령왕을 위해 만든 무덤이 무령왕릉이다.

성왕이 왕위에 즉위할 시기, 백제의 국내외 정세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부왕의 덕택에 웅진에 도읍할 즈음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여 날뛰던 귀족들도 억누를 수 있었고, 이제 국내 정치는 왕을 정점으로 체계가 잡혀가는 상태였다. 그러나 국가를 통제하기에는 제도가 아직 완비된 상태는 아니었다. 비록 불교가 나라안에 퍼져 있으나 국가의 이념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않는 혼란도 있고, 대외적으로 북쪽의 고구려는 그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동쪽의 신라와는 서로 화목한 관계에 있었을 뿐이다.

성왕은 왕위에 오른 다음, 우선 대내적으로 확고한 통치기반의 확립이 필요하였다. 그것이 백제의 웅진도읍기에 문물제도의 정비로 나타난다. 백제의 중앙관제는 6좌평, 16관등제가 마련되었지만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확대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지방을 통할할 수 있는 제도도 아직 완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성왕은 우선 중앙의 제도의 재정비부터 나선다. 그는 관등제의 엄격한 실시와 더불어 중앙의 행정제도 즉 22부제를 마련하는 작업부터 실시한다. 관등제의 경우 백제는 고이왕대에 그 대강이 마련되어 있었다. 제도로서 관등제는 복색(服色), 관식(冠飾), 대색(帶色)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실제 실행되지 않고 제도로서만 존재하였는데 성왕은 이의 적극적 실행을 도모하는 한편, 좌평, 달솔에서 진무, 극우에 이르는 14관등에 문독과 무독을 추가시켜 완벽한 16관등으로 정비하였다. 그러면서 좌평과 달솔은 정원을 각각 5명과 30명으로 한정하여 16관등제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이러한 관등제의 정비는 국가의 모든 질서체제를 하나로 통일함으로서 통치의 효율을 극대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한편 종전에는 중앙관부가 16관등에 편재된 6좌평 중심으로 업무가 분담되었는데, 업무의 확대에 따른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중앙관부를 내관(內官) 12부와 외관(外官) 10부로 구성하였다. 나아가 내관은 궁중과 관련된 사무를 관장토록 하였고, 외관은 일반 서정(庶政)을 담당케 함으로서 국가운영에 공사를 엄격히 하도록 하였다.

성왕의 통치체제 마련중에 획기적인 것은 지방통제책의 마련이다. 백제는 한성시대의 미숙한 지방통제책이 웅진에 도읍하면서 왕의 부친인 무령왕대에 담로제를 정비하여 22개 지역에 담로를 설치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책은 전국을 일원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개편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성왕은 정연한 통제방식인 방-군-성(현)제를 구축한 것이다. 이에 백제는 전국을 방-군-성(현)으로 편제하였는데 5방-37군-200성(현)으로 조직한 것이다.

성왕은 이중에 5방성을 중심지역으로 삼으면서 각각의 방은 자신의 직할지와 그에 부속되는 성(현)을 소유토록 하였다. 또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10여개의 군도 통솔토록 하였는데 방의 장관은 방령(方領)으로 달솔(達率)의 관등을 가진 자로 임명하였으며, 방령 아래에 방좌(方佐)를 배속시켜 그의 업무를 보좌토록 하였다. 각 방성(方城)에는 1000명 내지 700명의 군대도 배치하고, 방령을 최고 지방행정관임과 동시에 군지휘관의 역할도 담당토록 하였다. 아울러 군(郡)도 방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직할지를 두도록 하여 5~6개의 성을 통할케 하였다. 물론 군의 장은 군장(郡將) 또는 군령(郡令)이라 하여, 덕솔(德率)의 관등을 가진 자를 임명하였다.

이처럼 왕위에 오른 성왕은 대내적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국가통치의 기반을 어느 정도 확고하게 마련하였다. 이와같은 대내적 체제정비는 곧바로 불교사상의 보급을 통한 국가이념의 정립과, 이를 통한 대외발전을 꾀할 수 있었는데 특히 불교는 그가 웅진에 도읍하던 시기부터 꾸준히 장려하였던 것이다.

538년 우여곡절 끝에 백제는 도읍을 사비로 옮긴다. 지난 64년간 정든 웅진을 뒤로하고 사비로 천도하는 성왕으로는 감회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왜 백제가 웅진에 도읍할 수 밖에 없었던가. 한때 한반도를 호령하던 백제의 위상은 어디로 갔는가, 새로운 도읍지로 발길을 옮기는 성왕으로서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제의 웅진도읍은 백제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사비로 천도하기 60여년전 백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겪어야만 했다. 당시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고구려는 그 여세를 남쪽으로 몰아 백제를 압박하면서 백제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당시 강성한 고구려는 장수왕이 왕위에 있었는데 그는 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의 도읍인 한성을 포위하였다. 적의 기습을 받은 백제의 개로왕은 후에 문주왕이 된 동생 여도에게 구원군을 모을 것을 명령하면서 한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고구려의 대대적 공격에 왕도의 함락은 물론 개로왕도 적의 수중에 잡혀 아차산 아래에서 죽임을 당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백제는 결국 이 전쟁으로 왕과 왕비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피살되었고, 8,000여 명은 포로로 잡혀가는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문주왕은 마침내 한성을 버리고 새로운 도읍지인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웅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방어에는 유리한 점이 있었으나, 수도가 들어서기에는 너무나 협소한 곳이었다. 더욱이 천도자체가 왕실의 의도보다는 전쟁중에 이루어진 것이고, 지방의 수장들이 적지 않게 작용한 점도 없지 않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백제는 웅진에서 64년간 도읍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웅진 도읍기에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동성왕 무령왕이란 걸출한 왕들이 등장하면서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룩한다. 나아가 웅진에서의 정치적 안정을 이룩함과 동시에 국가 공민을 확보하고 농경지를 확대하는가 하면, 대외교류를 통해 경제력도 증대된다. 결국 웅진도읍시기의 이러한 번성은 성왕이 등극하면서 극에 달하게 되는데 성왕은 이를 토대로 보다 발전을 위한 새 터전인 사비로 천도한 것이다.

성왕의 사비천도는 역사적 사건이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 도읍지를 왕실에서 자의적으로 옮긴 사례는 많지 않다. 특히 일국의 수도를 옮기는 것은 강력한 왕권과 새로운 도읍지를 건설할 만한 경제력 및 사회적 결속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성왕의 사비천도는 이러한 정치, 사회, 경제적 제반 조건이 갖추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의 영도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천도계획은 성왕보다 이전에 마련되었겠지만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성왕이다.

성왕이 사비로 천도할 즈음의 도읍지의 현황을 추정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기본적 시설만 갖춘채 도읍을 옮겼을 것인데, 성왕은 사비 천도후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을 것이다. 현재 성왕이 천도하여 머물렀던 왕궁터는 확실하지 않지만 왕궁이 부소산성 전면, 즉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앞 일대라는 것이 고구려와의 산성체계 비교, 도로망, 출토유물 등을 통해 비정되고 있다. 성왕은 부소산성(扶蘇山城)을 중심으로 외곽의 요충지에 나성을 쌓았으며, 그 내부는 5부(部)로 구획하고, 각 부는 다시 5항(巷)으로 분리하여 한국 고대 도성제(都城制)의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성왕은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고자 한다. 그는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후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개칭하였다. 바야흐로 새로운 도읍지에서 새로운 국호를 가지고 새롭게 시작해 보려는 성왕의 의지가 그대로 묻어나는 인식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부여는 백제 왕실의 모태로서 왕실의 성(姓)인 부여씨(夫餘氏)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는 성왕이 안정된 왕조의 면모를 가지고 부여적 전통을 강조하여 왕실의 우월성을 보다 크게 과시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국호는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이 다시 백제로 바꾸지만 성왕의 국가경영을 위한 원대한 포부는 짐작할 수 있다.

성왕은 백제사에서 보면 커다란 자취를 많이 남긴 인물이다. 웅진도읍기 국가체제를 완비시키면서 이를 바탕으로 사비천도를 단행하여 국가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그의 업적이다 그런데 성왕이 우리역사에서 차지한 또다른 업적은 백제불교의 번영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성왕이 재위하던 시기보다 약 150여 년전인 침류왕 원년인 384년이다. 이때 왕실에 의한 불교 수입은 고등종교를 통한 백성의 교화를 도모하고자 한 것으로 그러한 목적은 백제를 비롯한 삼국시대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런데 백제는 침류왕대에 불교가 공인되었음에도 이후의 불교 흔적은 크게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백제사회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성왕대에 이르러서야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성왕’이라는 그의 시호에서 엿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철저한 불교 신봉자였다. 아마도 성왕의 개인적 신앙심외에 일국의 왕으로서 불교를 통해 다시 한 번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자 하는 바램도 있었을 것이다.

성왕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정책은 그가 웅진에 도읍하던 시기에 이룩한 대통사와 같은 창사기록 및 불경번역에서도 쉽게 엿볼 수 있다. 특히 불경번역은 새로운 통치이념의 근원지로써 이의 작업에 성왕은 직접 가담하기까지도 하였다. 또한 성왕은 서기 527년에는 당시의 도읍지인 웅진에 대통사를 창건하였다. 현재 대통사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공주시 봉황동 및 반죽동 일원의 평지에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이 곳에서 출토된 ‘大通’명 암키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찰을 구성하는 건물의 배치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중문-탑-금당-강당을 갖춘 전형적 백제의 가람형상을 갖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성왕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비단 국내적 활동에만 머문 것이 아니다. 불교의 융성을 위해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내용의 도입에 매우 적극적이다. 그는 사비 천도 후인 서기 541년에는 사신을 중국의 양나라에 보내어 열반경 등의 경전과 사찰을 지을 수 있는 장인들, 그리고 각종 기술자등을 청하고 있다. 이들은 사원건축과 같은 국가 토목사업에 관련된 장인인 것이 분명한데 이는 결과적으로 불교에 대한 성왕의 적극성을 보여주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왕은 이보다 앞선 538년부터 발전된 백제 불교를 일본에 전파하는데도 노력을 경주한다. 특히 성왕은 552에는 서부희씨(西部姬氏),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 등으로 하여금 금동석가불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일본에 보냈으며, 성왕 32년(554) 2월에는 승 담혜(曇慧) 등 9인을 이전의 도심(道深) 등 7인과 교체하여 파견하였다.

성왕은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국가체제의 면모를 일신하는 노력이 도처에서 확인되고, 이중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은 정치적으로 민심의 안정을 도모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왕 자신의 깊은 신앙심과 정열이 없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성왕은 불교의 확대보급을 백제에 국한시키지 않고, 불교의 불모지인 일본에 대해서는 전법(傳法)하여 일본 불교문화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점은 역사상 커다란 업적을 남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의 웅진천도는 국가적 수모인 동시에, 이후의 백제 왕들은 웅진천도로 잃었던 고토에 대한 회복에 대한 사명감이 늘상 자리하였을 것이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빼앗긴 한강유역은 백제의 발상지로 대중국 교통로의 요충지였다. 때문에 잃어버린 한강유역은 백제로서는 그들의 정신이 스며있는 곳임과 더불어 국가정책상 소홀히 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웅진천도 후에도 백제의 왕, 특히 성왕은 한강 수복의 꿈을 늘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웅진천도 초기의 어려운 환경에서 고토의 회복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국력의 증진이 이루어진 성왕때에 이르면 서서히 그 꿈을 실현하기 시작한다. 성왕은 즉위년인 523년에 고구려가 공격해 오자 1만명의 군대를 보내어 격파하였고, 즉위 후 7년이 지난 529에는 고구려의 안장왕(安臧王)이 거느린 군대를 3만군으로 막기도 한다. 그러나 전쟁이 여의치는 않았던 듯하다. 그는 오곡의 싸움에서 2천여명의 병사를 잃는 피해를 보기도 하고, 사비천도 후인 540년에도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성왕은 고토 회복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551년에 이르러 마침내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가야군, 신라군과 함께 대대적 군대를 발동하였다.

전투는 백제군과 가야군이 한강 하류지역을, 신라군은 한강 상류지역을 각각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인해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차지하였으며, 신라는 죽령이북에서 고현 이내에 이르는 10군을 점령함으로서 오랜 백제의 숙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성왕의 고토 회복에 대한 기쁨도 오랜 동맹관계에 있던 신라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물거품이 되고 만다. 신라가 백제와의 신의를 져버리고 553년 한강 하류지역까지 탈취해 버린 것이다. 이에 성왕은 신라에 대한 원한을 갖게 되었고, 그는 554년에 신라의 배신행위를 응징하기 위해 태자를 선봉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케 하였다. 신라도 이에 맞서 거국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관산성에서 일대 혈전을 벌이게 되었다.

사비도성에 있던 성왕은 전쟁에 앞서 아들 여창(餘昌)을 위로하겠다는 마음에서 전장(戰場)으로 나아간다. 그는 보병 50명과 함께 백제군의 진영으로 가던 중에 불행히도 구천에서 신라의 복병을 만나 결국 난투 끝에 전사하고 말았다. 왕을 죽인 사람은 다름아닌 지금의 충북 보은인 삼년산군 출신의 하급 촌주인 도도였다. 왕을 잃은 백제군은 갈팡질팡하게 되었고, 백제는 좌평 4명과 2만 9천 6백명의 병사를 잃는 커다란 손실을 겪게 되었다.

관산성 전투는 백제중흥의 주인공인 성왕의 죽음을 가져왔고 당시 욱일승천하던 백제로서는 여간한 타격이 아니었다. 성왕을 이어 그의 아들인 여창(餘昌)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부왕을 이어 등극하였지만 정국은 적지 않은 혼란을 겪게 된다.

성왕의 죽음은 충격적이다. 더욱이 이 전장에서 백제는 수많은 전사자를 내었다. 위덕왕이 능사(陵寺)를 세우고 전장터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성왕과 수많은 영령 등을 위로하고픈 심정은 충분히 이해된다. 여창은 죄책감에 잡혀 승려가 되고자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신 그는 부왕을 위해 능산리에 왕릉을 만들고 그 곁에 사찰을 세워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한다. 그러나 구천의 성왕에 맺힌 한을 달랠 수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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