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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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포리

갓개 -

비오는 포구에서 비닐우산 하나 받쳐들고 빈 강물 바라보며 돌아서 생각하면, 비릿한 생선내음 같은 추억에 눈물이 흐를것 같은 그런 이름이다.

백제여인의 정절이 서린 낙화암을 휘돌아온 물길이 강경 황산 나룻터를 지나 의자왕과 백제 망국민들이 피를 토하며 끌려 갔던 금강 물줄기를 따라 서남쪽으로 흐르는 그 굽이친 윗쪽에 자리한 갓개는, 백제시대 이전부터의 포구로 부여군 양화면 입포리를 말하는데 금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이후 1950년대까지<개도 지전을 물고 다닌다> <술먹고 돛대만 가리키면 만사 OK><마을 전체가 생선썩는 냄새로 비릿했다> <할일 없으면 갓개장에 가서 소금이나 한통 짊어지고 오라>는 등의 구전은 풍성했든 갓개 지방을 얘기하고 있지만 지금은 옛날의 장터 건물만 석양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포구였다는 기억조차 아슴아슴 멀어져 가는 시골마을로 변해버렸다.

직접 접안이 가능한 이 갓개포구는 금강변 최고의 포구로 1,500여척의 어선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일제시대엔 안흥, 장항, 강경과 함께 도내 4대포구 중의 하나로 장항을 통해 내륙에 들어서는 관포 노릇을 했다.
샛강이 없어지면 입포가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어느 고승의 예언처럼 50년대에 어업 협동조합이 창립되면서 개인 객주의 권한이 사라지고 선조들이 아끼던 샛강도 입구만 남은채 매립되어 택지와 농토로 변하면서 갓개의 영화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지방에는 다음과 같은 슬픈 전설이 있다.

연평도로 조기잡이 떠나는 큰 배 한척이 황포돛대로 물그림자를 만들며 유유히 금강을 따라 흘러 가면서 그 배에 탄 사람들이 구슬프게 뱃노래를 부른다.

어여디어 어여디엇차
어겨디어 어이기어

칠산 연평 있는 고기는
우리배 그물로 다 들었구나
어여디어 어여디엇차
우리집 서방님은 조기잡이를 갔는데
바람아 광풍아 석달 열흘만 불어라

어여디어 어여디엇차
배 임자네 아주머니
일년 열두달 정성을 잘 드려서
칠산 연평도 장원 하였네
에해아 어헤헤 어호어 좋다

어여디어 어여디엇차
어기디어 어이기어

오랜 옛날 고려때 이야기라고 한다.
갯가에 차분하게 배를 타고 돈을 벌은한 사공이 있었다.
나이는 비록 서른 안팍이었지만 바다에 나가면 고기떼를 잘 알아보고 천기를 잘 보아서 배를 탄지 10년도 못되어 선장이 되었다.
1년에 크게 그물질하는 연평도 조기잡이와 흑산도 홍어잡이 두번만 치러도 그가 부리는 배에 탄 사람들은 일년동안을 떵떵거리고 살만큼 고기를 많이 잡아서 여유있게 살수 있었다.
겨울이 가고, 꽃피고 새우는 봄이 되면서 그물을 손질한 그 젊은 사공의 배도 연평도로 조기잡이 떠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지난해에 결혼을 해서 아내로 맞이한 아직 처녀티가 가시지 않은 젊은 아내가 선주집에서 떡시루를 이고오고 소지를 올리며 화장이 한번씩 쳐보는 북소리가 은은하게 강물에 젖어드는 초저녁이었다.
젊은 사공은 돛대높이 풍어를 비는 깃발을 올리고 아직도 갯가에서 횃불을 들고 서있는 아내에게 잘있으라는 손짓을 하고 금강 하류로 뱃머리를 돌렸다.
바람한점 없는 밤이었다.

썰물에 배는 떠내려 가듯이 서해바다를 가로질러 연평도에 다달았으며, 단한번 바다에 그물을 던진것이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아서 이튿날로 뱃머리를 돌렸다.
금년 조기잡이도 크게 성공한 것이었다.

젊은 사공은 갓개로 돌아와서 바로 새우잡이 준비를 하다가 이제부터는 자기가 배를 사서 선주가 되고 선장을 겸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화양면 옥포에 가서 배를 한척 사들이고는 그 배에새우잡이 주비를 서둘렀다.

그가 선주가 되자 그와같이 배를 탔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배를 타게 되었으며 지나번까지 탔던 선주의 배에는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만 타게 되었다.
그러한 젊은 사공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한 선주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마을을 돌아다니며 배신자, 은혜를 모르는 놈이라고 혹평을 하고 다녔지만 이제 선주가 된 젊은 사공은 이런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가난에 쪼들렸든 세월을 생각하며 심한 모욕감을 느낄때마다 입술을 깨물며 열심히 배질만 했다.
연평도로, 흑산도로 고기잡이를 갈때마다 그의 배만은 만선이었다.

그러나 그가 먼저 부리던 선주네 배는 그가 그물질한던 다음날 바다에 그물을 쳤으나 심한 풍랑에 그물을 떠내려 보내고 낙엽처럼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겨우 목숨만 부지한채 돌아오고 말았다.

다시 또 겨울이 가고 새봄이 돌아와서 젊은 사공은 고기잡이 준비를 서둘렀다.

아침 햇살이 밝게 비치는날, 배를 띄우고 연평도로 향했다.
전에 그가 탔던 선주네집 배는 조지잡이 떠날 돈이 없어서 샛강 어귀에 배를 깊숙히 대어놓고 있었다.
그가 연평조오 떠나던 날, 그의 아내는 밤이 깊도록 뒷뜰에 정한수를 떠놓고 풍어와 함께 남편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내 두사람이 담을 뛰어넘어 드러와서는 그녀를 쓰러뜨리고 뜨겁게 달구어진 쇠막대기로 눈을 지져 앞을 못보게 하고 달아났다.
갑자기 눈이 멀은 아내는 엉금엉금 기어서 방에 들어가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연평도에 다다른 젊은 사공은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아 뱃머리를 돌렸다.
풍어중에 대 풍어였다.
젊은 사공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생각에 선원들을 독려하며 배를 몰았으나 고기를 가득실은 배는 마음처럼 빠르게 움직여주질 않았다.

배가 드디어 안흥 앞바다에 이르렀을때 갑자기 광풍이 불더니 신진도 앞바다의 암초에 배가 부딪히며 함께 타고온 선원들과 함께 거센 파도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잘 살아보겠다고 욕심을 부린것이 화근이었다.

봉사가 되어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학수 고대하던 아내에게는 한달이 되어도, 반년이 되어도, 일년이 지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고기잡이 나간 배가 파선이 되면 뱃사람들이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그녀 남편의 최후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연평도에서 그배만 재수좋은 만선이 되어 남쪽으로 떠났다는 소식 뿐이었다.

봉사가 된 아내는 남편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더듬더듬 연평도까지 찾아가기도 했었으나 연평조 파시에서도 노랭이 사공으로 통하던 남편의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서해안의 포구마다 찾아다니며 남편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안흥땅을 지나는 길에 그녀는 이상한 북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북을 치고있는 소년에게 그북을 어디서 샀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소년은 안흥 앞바다 신지도에 망둥이 낚시질을 갔다가 주운 북이라고 했다.
그녀가 북을 만져 보았다.

풍어가 되면 북을 치고 돌아올때 손잡이가 거칠다고 해서 자기가 수를 놓아 두툼하게 매달아준 손잡이가 손에 잡혔다.
그녀는 그 북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남편의 북이었다.
며칠동안 바닷가를 헤메이든 그녀는 남편이 남기고간 마지막 유물인 북을 들고 갓개로 돌아왔다.
그럭저럭 그녀의 나이도 사십이 가깝게 되었다.
남편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십여년을 헤메였든것이다.
그녀는 갓개포구에 배가 들어오면 공연히 선창에 나가서 짠내도 맡았다.

남편의 땀내음 깥은 짠내를 맡으면서 흥얼흥얼 콧노래도 불렀다.
뱃사람들이 노를 저으며 은연중 지껄이는 장단에 혼자서 가사를 부쳤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는 세월이 흐를수록 이곳의 뱃사람들이 부르게 되었고, 충청도 지방에서 독특하게 이어져오는 갓개 뱃노래는 그래서 구슬픈 뱃노래라 전해져 온다.

이러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갓개의 지명은 포구의 모양이 삿갓모양과 같다하여 삿가입자를, 또 강가라하여 물가 포자를 써 입포라 부르게 되었다하며, 또한 이 지역을 지나든 한 걸승이 포구의 모양을 보고 자기가 쓰고 있고 있든 갓모양 같다하여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백제와 신라때는 가림군을 속했었고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대동면의 지역이었다.
입포는 처음 갓개라고 불리웠든 작은 포구로써 전북 익산시 웅포면(제석)을 건너 다니는 나룻터였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김해김씨가 정착하여 부락을 형성해 나갔으며 수로를 통해 들어온 수산물 시장이 활기를 띠면서 빠른 속도로 큰 마을이 되어갔다.
한대는 시장내에 신흥옥, 일미식당, 함열옥, 대흥옥, 등의 술집이 있어 분냄새 짙은 색시들의 한섞인 노래소리와 뱃살람들의 걸직한 육담이 끊이지 않기도 했었으며 개도 지전을 물고 다닌다는 얘기가 회자될 정도로 풍성함을 누리기도 했었으나 1960년대 중반부터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시장이 쇠락해져 지금은 땅에 묻힌 비릿한 생선 냄새에서 옛 포구의 기억만 남아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지서면의 지역이었고 고종 32년(1895)에 대적면에 편입되었다가 1941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상입포리, 하입포리와 지지서면의 초일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윗갓개, 아래 갓개와 동쪽에 마을이 있다하여 동녁개라 부르는 곳과 마을과 떨어져 있는 지역에 자리한 마을이라서 북간도, 서쪽에 마을이 자래해서 섯녁재라 이름하는 곳등주로 상업과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고, 1958년 8월 26일에서 1961년 6월 15일까지 3년동안 양화면장을 지내셨던 안흥춘 명장님이 이고장 출신이고, 1976년 4월부터 1977년 3월까지 면정을 책임지셨던 전병원 면장님, 1964년 4월 10일 공직자의 첫출발을 양화면사무소에서 시작하신후 1993년 7월 1일부터 1996년 7월 3일까지 양화면장직에 계시다 퇴임하신 김요길 면장님과 1969년 4월 12월부터 1986년까지 17여년 동안 전염병 예방주사를 놓아 주시는등 무의촌 진료활동에 공을 많으셨든 향화보건 지소장을 지내신 장구봉씨가 이 지역에 연고를 두셨고, 교보생명 이사직을 역임하셨던 노광삼씨와 양화면 에서 오형환 연수원장 다음으로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승기씨와 춘천교육대 교수로계신 나병소씨가 이마을 출신이다.

초왕리

서북쪽으로는 가뭄이 심할때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하여 무제산이라고도 부르고 고려때에는 보광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하여 보광산이라고도 무르는 무제봉이 우뚝서고, 전체적으로 산이, 맥이 흐르듯 깔려 있으며 냇물로는 초왕천에 들어서는 탁굴천과 손머리천, 왕동천 등이 흐르고, 동남쪽으로 작은 들을 조성한 지역에 초왕리는 자리한다.
백제와 신라때는 가림군에 속했으며 백제 멸망후 백제 유민들이 나당군을 피해서 숨어있던 사람들이 그후 정착했다는 구전은 있으나 확실치 않으며 부락이 형성되기는 고려 초기부터로 추정된다.
고려때는 임천군에 속해 있ㅇ었으며 난을 피해 선비들이 산막을 짓고 피난살이를 하다 정착하였다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 초기엔 임천군 적량면 지역이었으며 동래정씨가 정착하여 부락을 형성한후 이어 진주강씨, 김해김씨,한산이씨, 금년김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기 시작 하였으며 이어 전주최씨의 정착과 마을 형성으로 많은 인물이 배출된 지역이다.
고종 32년(1895년) 대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풀이 많은 지역이라 하여 새(풀)울, 또는 왕동이라 불리웠던 마을일부와 지서면 탑리 일부를 병합하여 초왕리라 부르고 368ha의 면적에 71가구 191명의 인구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는데 왕골마을 입구엔 <학생 허인 처 금녕김씨 효열지문>이 있고, 마을 안쪽 북서쪽 야산 기슭엔 백촌 김문기 선생을 배향한 <왕의 영당> 검숙골 산모퉁이 압구 200여년된 느티나무 옆에 소용술의 처 김해김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1931년 에 중건한 정려가 있으며, 새울부락 뒷쪽의 계곡 깊숙히 들어간 곳에 길이 120cm 너비 60cm 크기의 개석 2매가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에는 많은 수의 고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의 주요 인사로는 일제 강정기에 금계청년회를 조직, 야학당을 개설하여 애국정신을 함양하였고, 1931년 대만에서 애국단체<조선인 친우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금다 1934년에 검거되어 옥사하신 허환(1900-1934)선생과 1956년 8월 8일부터 1958년7월 24일 까지 양화면장을 지내신 허전 면장님, 1991년 1월 1일에서 1993년 6월 30일까지 양화면장직에 계셨든 허정재 면장님이 부자지간으로 왕골마을에서 태어나셨으며 전 고려대학교 불문과 교수를 지내셨든 허문강씨도 이 마을 출신이시다.

오량리

양화면 북쪽들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오량천과 작은 냇물이 흐르는 들녘, 위와 아래쪽에 오량리는 위치한다.
백제와 신라때는 가림군에 속했으며 백제때 이미 부락의 형성이 이루어졌으며 대나무 밭이 많다하여 대수골, 또는 죽리라 불리는 곳과 마을 지형이 가재 형국이며 다섯 소나무 정자가 있다하여 오송대라 불리웠던 마을에 큰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다.
고려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적량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조 초기 원주이씨가 정착하여 농경지를 개간하여 갔으며 이어 고령박씨와 연일정씨, 전주최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하여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지역이다.
그리고 해주오씨의 정착으로 마을 형태를 완전히 이루었으나 조선시대 조정의 여러차례 사화로 수난을 겪었던 씨족이 거주하든 지역으로도 알려져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적량면의 지역으로써 적량면 사무소가 이지역에 있었으며 고종 32년(1895년)에 대적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오송리, 적량리, 왕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송과 적량의 이름을 따서 오량리라 부르며, 오송대마을 남쪽에 우뚝 서있는 금년으로 창립 101주년을 맞은 오량교회 주변의 고추밭과 깨밭에 격자문 및 승문이 타날된 회색연토기편과 적갈색 연질토기편이 채집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직역은 원삼국시대의 취락지였다고 판단되며 마을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이름붙여진 용머리 마을을 기점으로 하여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부골 마을 뒷산, 밤나무 단지가 조성된 곳에선 선조문, 격자 음각횡선이 타날되어 있는 경질토기편들이 채집되는 것으로 보아 백제시대의 취락지 였을가능성이 있으며,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대수골로 불리우는 마을 입구에 180*170*30cm 크기의 고인돌로 보이는 괴석이 있어 청동기 시대의 선사분묘 유적지로 생각된다.
지금은 경지정리로 옛 정취를 잃었지만 겨울내내 이듬해 농사지을 물을 가두어 추운 겨울날 썰매를 타고 놀았든 부랭이 들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 지역 출신 인사로는 1961년 11월 8일에서 1963년 4월 4일까지, 1970년12월 부터 1976월 부터 1976년 4월까지 총 8년동안 양화면장을 지내셨든 오덕근 면장님과 그분의 아드님이신 오형환 공무원 연수원장, 문학박사이신 박붕배전 서울교대 교수, 보험감독원 부원장이셨고 지금은 전국은행연합회 부회장으로 계신 김종성씨가 이 지역 출신이시며, 철도청 차량 정비 본부장으로 계신 이장환씨와 지난 10월 4일 제33대 양화면장으로 취임하신 황양하 면장님도 이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이처럼 유명인사가 뿌리를 두고 있는 오량리는 231ha의 면적에 101가구 267명의 인구가 살고있다.

족교리

옛날-글 잘하는 선비들이 모여살아 요산이라고도 부르고 인간의 힘 보다는 자연의 힘이 더 크게 지배하는것 같은 지형에 마을이 있다해서 역구산이라고도 부르는 곳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였지만 남겨놓은 재산이 많아서 그런데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19세난된 아들에게 아내를 얻어주지 못하나는게 한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건너마을로 며느리감을 구하러 나갔던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판에서 소나기를 만나 평소 알고 지내든 황서방 집으로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갔다.
쉽게 그칠줄 알았던 비는 더 세차게 쏟아지고 할수없이 그녀는 홀애비인 황서방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황서방 역시 일찍 아내를 잃고 딸 하나와 함께 살고 있든 처지라 인정이 구리웠든지 비에 젖은 그녀가 행여 감기라도 들릴까봐 부엌에 드나들며 불을 때고 이불을 덮어주곤 했다.
이렇게 황서방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부터 그녀는 황서방의 푸근한 정을 잊을 수 없어 아들방에 불이 꺼지만 하면 들녘ㅇ의 냇물을 건너 매일방 황서방 집을 찾아가곤 했다.
밤마다 어머니가 집을 비우는 것을 이상히 생각한 아들이 하룻맙은 어머니의 뒤를 숨어서 따라가 보았다.
집을 나선 어머니가 차가운 냇물을 건너가자 얼마 안있어 황상방 집이 불이 켜졌다.
아들은 어머니를 미워하기 이전에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밤마다 추운줄도 모르고 황서방 집을 찾아 가실까? 하는 생각에 그 다음날 어머니가 냇가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가서 숨어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냇가에 도착하시자<어머니, 발이 얼마나 시렵겠어요. 진작 저한테 말씀하시지 않구요, 새벽에도 제가 기다리고 있을께요> 부끄러워 얼굴 붉히시는 어머니를 등에 업고 냇물을 건널때 아들의 넓직한 등판엔 뜨거운 눈물이 방울지며 떨어 졌으리라. 그후로도 매일같이 어머니를 업고 냇물을 건너주던 아들은 황서방 집을 직접 찾아가 아버지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고 끝내는 황서방을 자기집으로 모셔와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 후 아들은 크게 벼슬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였고 좀더 큰 고을로 이사를 하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어머니는 그 냇가가 보이는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하시며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냇물과 함께 흐르는 애틋한 정의 그리움 때문 이었을까? 지금도 이 마을이 족교리라고 불리우는 것은 발로 냇물을 건너 다리행세를 했다하여 발다리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족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가 있는 곳으로써, 백제와 신라때는 가림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임천군, 조선조 초기에는 적량면 지역이었으며 역구산은 조선중엽 상주이씨와 전주최씨가 입촌하여 촌락을 이루었으며, 밀양박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하여 박가말또는 마박이라고 부르는 지역과 처음 이곳에 정착한 한선비가 글을 내 놓으면 모른다는 대답으로 일관하는 버릇이 있어서 알고도 모르는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이라 해서 맹골이라고 부르다가 망골이라고 부르게 된 지역이 큰 부락을 이루었고 1895년 대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여군 양화면에 속해 208ha의 면적에 75가구 180명의 인구가 살며 오늘에 이르고, 전북 전주 체신청장을 지내셨든 이익상씨와 대주사료주식회사 대표이사를 역임하셨든 이계상씨가 이마을에서 태어나셨다.

벽용리

양화면의 서쪽에 위치해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산의 능선아래 들이 깔리고 낮은 야산 지대와 함깨 서쪽의 들녘을 넓은 농경지로 보유하고 망배산을 동남쪽에 둔 지역에 벽용리는 자리한다.
백제와 신라때는 가람군에 속했으며 백제때에 이미 지금의 토성산 밑에 군사가 주둔 하였다는 사수막이라 터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인류의 발자욱은 이미 그 이전부터 벽용리 일대에 깔려진 것으로 사료되나 부락의 형성은 훨씬 후 였으리라 생각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홍화면의 지역 이었으며 이때 풍양조씨들의 대거 정착으로 처음 집성촌이 등장 하였으며 이어 함평이씨, 단양우씨, 남양홍씨, 강릉함씨 들이 부락을 형성해 나간 중요 성씨들이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암천군 홍화면의 지역이었으나 고종 32년(1895년)지방관제 개정때에 홍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벽절 덕용골과 월은리, 윤동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벽절과 덕용의 이름을 따서 벽용리라 부르며 고려말기 또는 조선초기에 벽절 고을에 엄청난 규모의 절이 있어서 아침과 저녁, 승려들의 밥을 짖기위해 쌀을 씻으면 그 쌀 뜨물이 송정2리로 가는 마을입구 냇가에 까지 흐른다하여 그 내를 건너는 다리 이름을 조석다리라 불렀다하며, 지금도 논이나 밭에서 그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나 주춧돌 등이 발견되곤 한다.
또한 벽용입구에서 송정리로 가는길 옆 구름 일대에서 승문 타날된 경질 시루편, 3족기, 고백편등과 함께 각종 회색연질 및 경질과 적갈색 연질토기편들이 대량 발굴되어 대규모의 백제 취락지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 구성은 동네에 설중 반월형의 명당이 있다하여 설중이 또는 설쟁이, 마을지형이 사람의 목과 같이 생겼다 하여 목과 동-또또는 모가울, 둥근산이 있어서 동구재, 마을 가운데 방죽이 있다해서 방죽골, 모래가 많고 마을 뒷산에 백제시대 토성이 있어서 그 성을 지키는 막이 있었다 하여 사수막, 또는 사스매기, 옛날-근천에 못이 있어서 백년동아 덕을 쌓은 이무기가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 하였다는 덕용굴, 마을에 흐르는 냇물에 돌이 많아 내가 항상 말라있다 해서 건촌 또는 건드래,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문을 가르치든 서당이 있다하여 서당골로 불리우든 곳이 합해져 큰마을을 이루었고 화학감을 지내신 이건태 장군(준장)과 현재육군본부에 근무하는 한홍전 대령, 인천시내 굴지의 운수회사 회장님이시며 재인 충남도민 회장을 역임하셨든 심영섭 공성운수 회장님, 서울지검 부장검사 이신 함영업 검사님과 1981년 10월부터 1982년 5까지 양화면장을 지내셨든 이건학 면장님, 용산빌딩 사장이시며 재경면민회 회장을 지내셨든 우무구씨가 이 마을 출신이시며 이분들이 태어나신 벽용리는 356ha의 면적에 112가구 361명이 비닐하우스, 낙농, 벼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송정리

서쪽의 석천산, 동쪽의 무제산 중간지점에 충화면 가화리 저수지를 머리에 이고 송정리는 자리한다.
백제와 신라때는 가림군에 속했으면 백제 이전에 취락의 형성이 있었다는 송정리는 북부지역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때때로 발견이 되며 백제 멸망후 큰 부락도 형성 되었었으나 통일신라시대, 고려초기를 겪으면서 분산, 고려중기 이후에 다시 마을이 형성된듯 현재 안착하고 있는 모든 마을은 고려중기 이후로 추측한다.
고려와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홍화면의 지역이었고 밀양박씨의 정착으로 그 씨족의 집성촌이 형성 되었으며 이어 경주최씨와 전주이씨의 정착으로 들이 개간되고 큰 부락을 만들었다.
조선조 말기까지 임천군 홍화면의 지역이었다가 마을에 소나무 정자가 많다하여 소정이 또는 송정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년)에 홍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오산 아래에 마을이 있다하여 오밭 또는 오전리라고 부르는 곳과 월은리 일부를 병합하여 송정리라 해서 부여군 양화면에 편입되었고 265ha의 면적에 53가구,147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현재 충북 청주청장으로 재직중인 최찬묵 씨가 이마을 출신이다.

수원리

백제 멸망후 당나라로 끌려가는 의자왕과 백성들을 보내면서 백제에 남은 유민들이 산위에 올라가 통곡 하였다는 망배산을 동쪽에 두고 서쪽은 넓은들로 꽉 채인 지역에 수원리는 자리한다.
냇물로는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윤동천과 가자골천이 있으며 낮은 산악지대가 들과 조화를 이루기도 하는 지역이다.
백제 유민들이 많이 정착하여 때로는 백제 부흥군에 가담하여 피를 많이 흘린 유민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 오기도 하는 지역이다.
고려때는 임천군에 속한 농촌 이었으나 고려시대를 겪으면서 정착한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쇠퇴하는 지역같이 보였으나 고려 말기에 달성서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어 새로운 활기에 찼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홍화면의 지역이었고,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원주이씨, 풍양조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 하였으며 농경지로써 입지 조건이 좋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임천군 황화면의 지역으로써 물의 근원이 좋으므로 수원골, 또는 수원곡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년)에 홍산면 합하여 수원리라 부르고 리의 면적은 278ha, 가구수는 117호,310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한국전쟁 발발이후 부모잃은 고아들의 보육시설이 있었던 과수원집이 1948년 3월 25일부터 1949년 3월 16일까지 양화면장을 지내셨던 김성 전 면장님의 본가이며, 들과 마을이 평평하다하여 마루골, 마을 지형이 말의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말머리, 마두라고 부르는 지역, 원주이씨들이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하여 새터, 감나무가 많아서 감나무골, 망배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신선객이 많이 머물렀던 마을이라 가자울, 또는 가자곡이라 부르는 지역과 물길이 좋은 마을이라해서 수통리-수원골 아래쪽에 있다해서 하수원이라 부르는 마을이 어우러져 큰 부락을 이루었고 한국도로공사 이사로 계셨던 유병호씨가 이마을 출신이시고 현재 서울지원에 재직중인 조성권 판사와 대전한의원 원장이시며 재경 양화면민 회장을 지내셨던 서배원씨가 수원1리에서 태어나셨다.

상촌리

서남쪽으로 흐르는 낮은 산악지대가 금강에 접어들면서 기름진 넓은 들을 조성하고, 서쪽으로는 지금은 없어진 내동천과 원산천이 흐르는 들녘도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만 해도 금강물이 드나드는 강이었고 낮은 산악지대 끝머리에는 포구가 있어서 많은 배들이 기항 했었다.
그래서 상지포라 불리웠으며 소금배와 새우젖배가 무수히 드나들던 지역이 상촌리의 포구였다.
백제와 신라때는 가림군의 지역 이었으며 고려때는 임천고을 속했었고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상지면 지역이었다.
백제 때부터 취락의 형성이 있었다고 구전에 전해오나 인류의 정착은 통일신라 후부터 였다고 추정되며 부락의 형성은 고려 말기쯤으로 추산된다.
밀양박씨의 정착으로 상지포가에 부락이 형성된 것은 고려말기에며 임진왜란 무렵 금녕김씨, 한산이씨, 진주유씨의 정착과 집성촌 형성으로 상촌리는오늘과 같은 발전에 이르른다.
조선조말, 임천군 상지면의 지역으로써 상지포가에 있으므로 상촌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년)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홍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교항리, 홍화면의 수원리 각 일부와 한산군 동상면의 녹양리일부를 병합하여 상촌리라 해서 부여군 양화면에 편입되었고, 상지포라는 갯가에 위치해 있다해서 상온 또는 상촌이라 부르는 마을과 한 겨울이며 기러기가 많이 날아오던 지역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안곡또는 안골이라 불리우는 곳과 고읍인근 마을로써 마구생이라 하여 말 먹이든 곳이 있으며, 바위가 말안장처럼 생겼다 하여 안장바위, 서당이 있었다 하여 서당골이라 부르는 마을이 합해져 큰 부락을 이루었고, 지금은 경지정리로 인하여 넓은 들이 조성되어 그 원형을 찾기가 힘들지만 방죽안골 윗편에 명문 세도가들이 모여살든 집당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전해져 온다.
상지개-옛노인들의 기억에 상지개로 불리든 이 마을은 334ha의 면적에 81가구 205명의 인구가 함께 살고 있으며 동진기업 대표이시며 재경면민회장을 지내셨든 이환직씨와 한양대학교 교무처장을 지내신 이광직씨,현대자동차 써비스 부산사업소장이신 이선직씨가 형제분으로 이마을 출신이시다.

시음리

지형상 양화반도의 끝머리에 위치해 있어서 금강변 갯가에 자리잡고 있어야 할 마을이지만 현재는 제방 공사로 마을 앞에 들이 조성되고 움푹 들어간 갯가도 발견할 수 없으나 이 지역은 100여년 전만해도 강물이 철썩거리는 강변이었다.
동쪽에 자리한 산악산에서 들과 범벅이 되어 흐르는 넓은 들녘과 드메기천,작곡천, 시음천으로 이어지는 들에 물이 흐르고 그래서 백제 때에도 이곳에는 고을이 있었을 만큼 중요하고 수려한 지역이었다.
백제와 신라때는 가림군에 속했으며 백제때 이미 곱절에 마을이 있었다는 구전에 따라 마을 형성이 있었을 것이며 백제 멸망 후에는 백제 유민들이 이 지역에 모여 살던 곳이라 한다.
고려때에는 임천군에 속해서 금강 수로변에 자리한 한가한 농촌지대였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상지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조 초기 금녕김씨가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었고, 이어 여산송씨, 한산이씨, 남양전씨들의 정착으로 해륙을 통한 산업지역으로 발전해 갔었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임천군 상지면의 지역으로써 뒷산이 시루처럼 생겼으므로 시루미, 변하여 시음, 또는 금강가가 되므로 시름개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년)에 홍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고음리, 포촌리,교항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시음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자연 부락으로는 백제때 고을이 있었던 마을이라 고읍,변하여 곱절이라 부르는 곳과 마을에 좋은 샘이 있으므로 샘골, 또는 천동이라하는 마을, 금강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서 시름개, 곱절 북쪽으로 등너머에 있다해서 등너머라고 부르다가 변해서 드메게,두목리라고도 부르는 지역, 그 아래쪽에 있는 아랫말 등이 합하여 전체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백제 때에 가림성의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산이어서 군장산이라 불리우는 야산엔 한의학에 밝았던 윤민영선생이 세운 세심정이 있고, 곱절마을 아래쪽으로 들로 이어진 길옆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의 팽나무와 선돌이 있었으나 경지정리로 인해 팽나무는 그 나무의 없어짐을 안타깝게 여긴 주민의 관심으로 본래의 자리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 옮겨 심어졌으나 선돌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없어졌으며, 탑거리 위쪽, 지금의 감옥 역할을 했었다는 옥배미도 경지정리에 의해 원형조차 추측해 볼 수 없도록 훼손되었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원삼국시대나 백제시대의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학계에서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샘골마을 뒷편 수풀이 우거져 있는 구릉 정상부에선 원삼국 시대의 주거지로 추정되는 세격자문에 음각횡선이 있는 회색 연질토기편이 채집되고 시음2구 이건수씨의 과수원 일대에서 선조문이 타날된 경질의 백제 토기편들이 출토되기도 한다.
특히 이건수씨가 이곳에서 마제석검을 수습하였으나 분실한적이 있다고 하므로 청동기 시대의 분묘가 있었을 가능서도 있지만 지역민의 무관심과 당국의 외면으로 보존되어야할 유적과 유물들은 차츰 모두 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다.
이제 전북 익산시 웅포면을 건너 다녔던 시름개 나룻터는 흔적조차 아스라해진체 저녁노을만 옛정에 서러웁고 589ha의 면적에 146거구 401명의 주민들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있고 전국 어망협회 이사이신 이신복씨와 산업자원부 전력 정책과장으로 계신 이보원씨가 이마을 출신이시다.

내성리

북쪽 충화면과 임천면에서 이어져온 산줄기가 금강에 곤두박질하듯 방향을 바꾸다가 냇물을 긋고, 흩어진 흙더미 사이로 남쪽에 주저앉는 듯 쌓여진 나무숲으로 덮여진 지역에 작은 뜨락과 함께 내성리는 자리한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이 백성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갈 때 그 아낙과 아들- 그리고 백성들이 눈물로 흐르는 금강이 보이는 산위에 올라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정깊은 모든이에게 마지막 절을 올리며 찢어지는 가슴 억새풀로 동여메며 통곡 하였다는 망배산은 그래서 천삼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의 발자욱을 싫어한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그 아래 단장의 아픔같은 이별을 땅속 깊은곳에 묻어버린 내성리는 백제와 신라때는 가림군에 속했으며 고려와 조선초 초기까지 임천군 대적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중기부터 여산송씨가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수원백씨의 정착으로 집성촌이 이루어 졌으나 지금은 살지 않으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원주이씨의 정착으로 금강변과 그 주변의 마을 형성으로 내성리는 발전해 갔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임천군 대동면의 지역이었으나 고종 32년(1895년)대적면에 편입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내항리, 검성리, 원당리 일부를 병합하여 내항과 검성의 이름 따서 내성리라 부르며, 금강 연안에 산성처럼 둘러 싸여있는 마을이어서 금성리라 불리우는 곳과 양지바른곳에 마을이 위치해 있어 양지편, 옛날 술취한 사람들이 봉변을 자주 당할 만큼 여우들이 많이 출몰해서 여수골. 금강변 산악산 줄기 안쪽에 부엉이가 많이 산다해서 부엉이골. 금성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내동 또는 안말이라 부르는 곳, 마을 뒷산의 형국이 마치 황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해서 황골이라 부르는 마을이 합해져 큰 부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수상교통이 활발할 때 군산에서 강경까지 운항되던 여객선의 승선지로도 유명했었든 금성곶이 부근엔 홍수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배수장이 들어서 있으며, 일제 강점기 명치 42년(1909년) 7월 19일 임천군 대적면 내항동 제10통 1호의 지번의 구 양화면사무소가 자리해 있었고 그 장소에서 원주인 이상재씨가 당시의 임천군수 박승준찌로부터 대적면장의 임명장을 받은이후 대정3년 (1914년)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초대 양화면장으로 취임하신 이래 대정 5년(1916)3월 10일 부여군 지주회 고문위촉,대정7년(1918년)10월 10일 입포 위생 조합장 겸임 발령을 받으셨고 소화4년(1920년)2월7일부터 소화8년(1933년)까지 입포 보안 조합장을 지내셨으니 그시대 피압박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셨든 분이 이 마을에서 태어나셨고, 지금은 양송이와 느타리버섯 재배사가 줄지어 있는 이지역 면적은 240ha이고 52가구 204명의 주민들이 이웃하여 살고 있다.

원당리

북쪽의 시루산에서 남쪽의 망배산과 그 아래 산악산에서 흐르는 산의 줄기 동쪽에 위치해서 냇물로는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금강에 유입되는 원당천이 있으며 서남쪽으로 펼쳐진 넓은 들에 원당리는 위치한다.
백제와 신라때는 가림군에 속했으며 백제 멸망후 구수내골 주변에 인류가 정착하였다고 하나 확실치 않으며 부락이 형성되기는 고려 초기로 짐작을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 초기까지 임천군 대동면의 지역이었고 조선시대에 밀양박씨와 김해김씨, 상주이씨가 설촌하여 부락을 형성해 나갔으며 조선조 중기에는 농경지 개간과 함께큰 부락이 접경을 이룩했던 지역이며 더구나 원댕이에는 임천군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소원을 비는 원당이 있어서 육로로 또는 해로로 찾아오는 이가 많아서 한때는 번잡을 누렸던 지역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대동면의 지역으로써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원당이 있어서 원댕이, 또는 원당이라 불렀다고도 하며 백제 패망 당시 당나라로 끌려가는 의자왕을 실은 배가 황산 나룻터를 지나 오는 걸 유왕산과 사당산에 있는 백제 유민들에게 연기를 피워 알려주며 당나라에 대한 원한을 깊이 새긴 원당산아래 마을이 이루어져 있다해서 원당리라 부르던 것이 후일 원당리로 개칭되었다 하나 확실치 않으며, 고종 32년(1895년)에 대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홍상면의 월은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늘의 원당리라 되었으며 마을에 우물이 아홉개가 있다하여 구수내골이라 부르는곳-밭 가운데 마을이 있으므로 밭가운데라고 부르다가 밭간디로 불리는곳- 양지바른 곳에 있는 마을이라 양지편-새로 생긴 마을이어서 새터-밭간디 아래쪽에 있다해서 아래뜸으로 불리우는 곳 들이 합해져 부락을 형성했으며 1934년8월 4일부터 1937년 6월 10일까지,1939년 8월 8일에서 1948년 3월 17일,다시 1949년3월17일부터 1956년 7월12일까지 총 19년 동안 일제강점기와 해방으로 인한 격변기, 6.25사변으로 통칭되는 한국전쟁 이후까지 양화면장으로 계시면서 지역민의 안녕과 사회질서 확립을 위해 애쓰신 김현중 면장님이 이 마을 출신이며 현재 육군본부에 근무하는 이기상 장군 또는 원당3리 양지편에서 태어났고, 야생화 연구소장으로 많은 책을 집필하신 김태정박사의 고향이 원당1리 아래뜸이며, 지금은227ha의 면적에 86가구 221명의 인구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암수리

양화면 동쪽으로 낮은 야산지대와 들 안쪽에 암수리는 자리한다.
농경지가 조성되기 전에는 들이 넓고 산이 가파르지 않아서 백제시대 기마병들의 수령장이었고 말을 사육하던 지역으로 전해져 오고 있어 부여군 군사리와 함께 많은 군사가 초막을 짓고 주둔 하였다고 전한다.
백제 패망당시 당나라로 잡혀가던 비운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과 그 신하들의 가족들이 단장의 아픔으로 이별을 나던 유왕산과 당나라 군사에게 화살을 날려 포로를 구하여 했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름 붙여진 사당산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암수리리는 백제와 신라때엔 가림군에 속했었고 사비성에 백제가 환도하기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오는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