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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곡리 고인돌

내곡리 고인돌 사진

상세정보
  • 구분 : 부여군향토유적
  • 지정번호 : 제37호
  • 관리자 : 부여군수
  •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남면 내곡리 215-31
문화재 소개

남면소재지 회동리에서 홍산방면으로 이어지는 지방도를 따라 약 1,200m 정도 가면 내곡리 진곡마을 입구 표지석이 있다. 고인돌군은 바로 이 마을 입구의 민가 뒤편 공터에 위치하고 있다. 속칭 `간바위`라는 이곳의 지명은 고인돌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4기 가량이 남아 있으나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70년대에 실시된 농경지 정리시 1기가 없어졌으며, 이곳 앞의 논 가운데에도 2∼3기가 더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확인되지 않는다. 지금 남아 있는 4기의 형태와 크기는 다음과 같다.

  • 1호 : 개석식, 260×150×50cm
  • 2호 : 탁자식, 260×160×50cm
  • 3호 : 개석식, 370×160×65cm
  • 4호 : 개석식, 200×150×70cm

이외에 주변에는 길이와 폭이 대략 100cm 가량되는 자그마한 석괴들이 3개 더 있으나, 이들이 각각 별개의 고인돌인지 아니면 개석으로부터 깨어져 나온 파편인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송암리호암 고인돌

송암리호암 고인돌 사진

상세정보
  • 구분 : 부여군향토유적
  • 지정번호 : 제36호
  • 관리자 : 부여군수
  •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남면 송암리 21-1
문화재 소개

남면소재지인 회동리에서 장암방면으로 통하는 지방도를 타고 약 1,600m 가량 가면 송암리 호암마을이 있다. 고인돌군은 이 마을의 입구 표지석으로부터 약 30∼40m 가량 동쪽의 길 건너편 소나무숲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고인돌로 판단되는 것은 8기 가량되나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과거 농경지 정리시 논 가운데에 있던 것들을 이곳에 옮겨 놓은 것도 있다고 하며 민묘 조성시 깨뜨려 일부 묘비석으로 전용하기도 하였다.

8기의 고인돌은 모두 개석식인데 그 크기는 다음과 같다.

  • 1호 : 500×280×120cm(성혈있음), 2호 : 220×140×50cm
  • 3호 : 290×140×100cm(개석이 3분됨. 그 중 1개가 묘비로 사용)
  • 4호 : 220×185×35cm(3분되어 있음), 5호 : 220×180×35cm
  • 6호 : 440×260×170cm(성혈있음),
  • 7호 : 개석이 2분되어 묘비로 사용, 8호 : 290×190×? cm

남면 마정리 우물

남면 마정리 우물 사진

상세정보
  • 구분 : 부여군향토유적
  • 지정번호 : 제90호
  • 관리자 : 부여군수
  •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남면 마정리 1091-2
문화재 소개
  • 이 우물의 조성연혁에 관련된 일화는 모두 두 가지가 전하고 있다. 그 하나는 무학대사 와 관련된 일화이다. 조선초에 무학대사가 마을을 지나다가 말에게 먹일 물을 찾던 중 우물이 있어 말에게 물을 먹였는데 말이 밟았던 바닥에 말발굽 자국이 생겼다 하여 말 우물이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이 우물의 이름에 기원하여 마을이름이 되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이 일대는 풍수상 말의 형국이 되고 샘 속 바닥에 말머리처럼 생 긴 바위가 있고 말의 입에서 물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도 우물 옆에는 자연 원 형의 편평한 돌 위에 말발굽 자국과 같은 형태가 남아 있다. 또한 무학대사와 관련 된 일화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마정리에서 남면사무소로 가는 지방도로 3호선에서 연결 되는 덕림병사와 관련된 일화이다. 풍양조씨 유허지가 남아 있는 이 자리를 무학대사가 터를 잡아주었다는 것이다. 이로 볼때 마정리 우물과 무학대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 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 일대의 마을이 점생마을(마을 뒷산이 제 비형국이라 집을 높은 곳에 지어야 좋다는 점상마을의 유래 ; 현 마정2리)과 우평마을 (쇠머리・소머리의 형국에서 유래한 하여 우평마을이라 함 ; 마정 1리)로 불리워 왔다는 점은 이 일대가 풍수적인 형국과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따 라서 이 우물의 기원은 무학대사가 활동하였던 고려시대 말 조선시대 초까지 거슬러 올 라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 두 번째는 홍산대첩시의 최영장군과 관련된 일화이다. 고려말 우왕(禑王) 2년(1376) 연 산 개태사(開泰寺)에 왜구가 침입하여 원사(元師) 박인계를 죽이는 등 행패가 심하자 최영(崔瑩)이 자청하여 출정하여 왜구를 거의 전멸시킨 전투인 홍산대첩시에 최영 장군 이 이 마을을 지나다 말에게 물을 먹인 우물 이라 하여 말우물(馬井)이라 하였다는 유 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