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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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리

규암면 행정의 중심지로 동쪽으로는 낙화암 구두레를 지나 그 물결이 백제교 아래를 지나게 되고 북쪽으로는 바둑판같은 나복(羅福)들의 농경지와 수로를 건너고 서쪽으로는 야산지대와 들녘을 남쪽으로는 광막할 만큼 넓은 들을 바라보는 지역에 규암리는 위치한다.
백제교가 놓여지기 전에는 규암나루로 유명했던 나루터가 이 곳에 있으며 백마강의 절경을 이루는 수북정도 자온대 위에 자리한다.
백제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신석기시대로 지적을 하나 구석기시대 수렵인 들이 정착하였던 지역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부여에 백제가 천도하였을 때는 한촌이었으나 여러 갈래로 드나드는 길이 있어 강을 건너던 휴식처임을 짐작할 수도 있다.
백제말기 나당군의 침공이 있을 대는 전쟁터 이었으며 사비성이 나당 군에 의해 점령된 후는 백제부흥군의 요람지였다.
그러나 도무재에서 700여명의 백제군이 저항하다가 모두 전사한 후부터는 그 성과 함께 다시 한촌으로 변해간다.
고려 때에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있는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군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강씨(晉州姜氏)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부락을 형성해 갔으며 이어서 조선시대에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정착 두 가문이 집성촌으로 이 지역에 오늘의 뿌리를 내린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 지역으로 엿바위가 있으므로 엿바위 또는 규암(窺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자온대(自溫臺), 수북정(水北亭)이 있으며 부풍사(扶風祠)라는 사당이 있고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초삼일 자온당산제(自溫堂山祭)를 지내고 있다.
1968년 백제교가 놓여지기 전에는 부여를 왕래하던 규암나루가 현재 유람선 선착장으로 이용되고 있고 한 때는 활기가 있던 규암시장이 교통의 발달로 부여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어 쇠퇴되었다.
영농조직으로는 규암원예작목반 22호 규암쌀작목반 43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으며 규암리에는 면사무소, 규암파출소, 규암농협. 규암우체국, 규암예비군면대, 백제권개발사업소등의 기관단체가 위치하고 있다.
리의 면적은 0.62㎢ 가구 수는 328호 인구는 765명이다.
자연부락으로는 엿바위와 새터가 있다.

외리

규암면의 남동쪽에 위치해서 백마강변에 면한 지역에 남으로 장암면과 경계를 이루며 지역이 온통 야산과 들로 범벅이 된 완충지대에 외리는 위치한다.
금강을 따라 올라오던 사공들이 배를 몰다가 여울밖 외리에 다다르면 북쪽을 바라보며 탄성과 함께 부여를 연호하였다는 그 여울 밖이 바로 지금의 외리 강변이다.
백제 때에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에는 어부들과 상인들이 배를 몰고 금강을 출입하며 기착하는 모래사장이 있었으며 더러는 외국상인들이 물건을 들고 와서 상 거래하는 시장이 되기도 했다.
외리의 인류 정착도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부터이다.
육지로부터 인류가 강변에 흘러와서 정착한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금강을 따라 올라가고 내려 다니던 선인(船人)들에 의해서 정착이 시작되고 부락이 형성되었다는 말이 구전으로 전하나 그럴지도 모른다.
그만치 신라시대까지는 수로를 필요로 하는 지역이었으며 육로보다 백마강이 더욱 소중한 지역이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는 부여군 내륙지방으로 드나드는 상선들이 대왕포를 지나 이 곳이 정박지였다 한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순천김씨(順天金氏)가 정착 집성촌을 이루었다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 면의 지역으로 내리에 있는 여울의 바깥이 되므로 바깥 말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리(內里), 검복리(檢卜里), 돌리(乭里), 임천군 북박면 석우리(石隅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외리라 해서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외리산성, 외리페사지가 있으며 1997년 밭 경지정리가 실시되었고 영농조직으로는 딴펄수박작목반 44호 돌말수박작목반 14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무우, 배추, 수박의 집산 단지이다.
외리에는 부여정보고등학교, 농업기반공사 부여출장소등의 기관이 위치해있다.
외리는 외1리, 외2리, 외3리로 나누며 면적은 3.02㎢ 가구는 607호 인구수는 1,725명이다.
자연부락으로는 금봉, 석촌, 딴펄이 있다.

내리

부소산의 북쪽으로부터 부산(浮山), 수북정으로 강물줄기를 활대처럼 꾸부려서는 장암면의 머리 쪽부터 다시 동쪽으로 흘러가게 하는 백마강의 그 위쪽에 위치해서 여울을 조성하는 서쪽에 내리는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낮은 야산지대를 형성하고 주위의 들과 아래쪽 금강변에 넓은 들녘을 조성하는 평야지대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고서 강변을 지키는 성이 쌓였던 지역이며 그 성벽은 금강의 범람으로 많이 허물어졌으나 아직껏 유적이 있는 지역이다.
인류의 정착은 신석기시대라고 전하나 뚜렷한 유물의 발굴로 입증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수렵시대에 인류가 정착하였음은 그 입지적 조건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淺乙面) 지역이었다.
토착민들이 오랫동안들을 개간한 지역이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김해김씨(金海金氏)와 순천김씨(順天金氏)의 정착으로 더욱 발전한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으로서 여울 안쪽이 되므로 속뜸 또는 속말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반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내리 성터가 있으며 1966년도에 규암 면에서는 처음으로 경지정리를 실시한 마을이나 기계화영농이 불편하여 1997년 재 경지정리를 실시하였다.
영농조직으로는 여울호박작목반7호, 여울수박작목반17호, 내2리수박작목반29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정관장 홍삼으로 유명한 한국인삼공사 고려홍삼창이 위치하고 내리는 내1리, 내2리로 나누며 면적은 3.06㎢ 가구 수는 233호 인구수는 589명이며 자연부락은 속뜸, 여울, 서당골, 북새기(北石), 풀뭇간이 있다.

반산리

지형적으로는 규암면의 중앙에 위치해서 서쪽으로는 반산저수지(九龍池)를 북쪽으로는 백마강으로 유입하는 수로를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넓은 들을 바라보는 야산지대에 반산리는 위치한다.
옛날에는 금강물이 범람하면 섬처럼 떠 있기도 하였다는 이 지역은 명당자리가 많다는 소문도 자자한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에 인류의 정착과 함께 부락이 형성되었으며 백제 멸망 후 많은 정착민과 함께 농경지 개간에 따라 큰 부락이 형성하였던 지역이다.
그 후 신라, 고려 때를 지나면서 비옥한 땅과 함께 부촌을 이루기도 하였으며 비교적 여유 많은 지역이 반산리 주변이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다.
원거인들이 부락을 형성하고 생활을 누렸으나 오늘날까지 뿌리내린 씨족은 없으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정착하고 집성촌을 이루면서 현재까지 이어오는 지역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의 천을면 지역으로서 소반모양의 산이 있으므로 소반뫼 또는 반산(盤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걸산리(杰山里), 신대리(新垈里) 일부를 병합하여 반산리로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반산성(盤山城)이 있으며 1972, 1988년에 경지정리를 실시하였으며 영농조직으로는 반산1리쌀작목반29호, 반산2리쌀작목반15호, 반산리수박작목반11호, 반산2리수박작목반9호의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또한 규암초등학교, 백제중학교, 육군7연대 3대대, 장애인종합복지관의 기관이 위치해있다.
반산저수지 인접에 2001년 대동황토방아파트 420호, 2002년 2월 무지게임대아파트 300호가 준공되었으며, 반산리는 반산1리, 반산2리, 반산3리, 반산4리(대동황토방아파트)로 나누며 면적은 1.66㎢ 가구수는 1,018호 인구수는 2,862명이며 자연부락은 걸산, 소반뫼, 학교삼거리가 있다.

합송리

규암면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반산저수지(九龍池)를 두고 서쪽으로는 구룡면에서 돌출해 오는 야산지대가 위치해있으며 동남쪽으로 넓은 들녘이 차지한 지역에 합송리(合松里)는 위치한다.
반산저수지를 이용한 수원이 풍부하여 비교적 부촌을 이루어 오는 지역이기도 하다.
백제 대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을의 형성도 그 때 이룩된 지역으로 전해오며 농경지대로 차분하게 역사를 접었던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송당면(松堂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교하노씨(交河盧氏)가 정착하여 부락을 형성해 나갔으며 이어 경주김씨(慶州金氏)가 정착하였으며 연안차씨(延安車氏)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며 농경지를 조성 점차적으로 발전을 거듭한 지역이다.
우리나라 농촌으로서 특히 충청도 농촌으로서 그 전통적인 농촌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역이며 농촌의 전통을 제대로 이어오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송당면 지역으로 면소재지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송동리(松東里) 송서리(松西里) 노화리(蘆花里) 일부를 병합하여 송동(松東)과 송서(松西)를 합하였다는 뜻으로 합송리라 하였고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1972, 1985, 1986, 1987년도 경지정리를 실시하였으나 기계화영농을 위하여 1998년 일부지역을 재경지정리한 지역이다.
영농조직으로는 합송한우작목반31호, 합송1리쌀작목반10호, 장구동쌀작목반15호, 합송수박작목반 9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합송리에는 합송초등학교, 백제어린이집, 규암농업협동조합 종합미곡처리장이 위치하고 또한 합송우체국이 1972년 개국하여 2000년 규암우체국에 통폐합되기도 하였다.
반산저수지 인접지에 2001년 4월 강산아파트 263호가 준공되었다.
합송리는 합송1리, 합송2리, 합송3리, 합송4리(강산아파트)로 나누며 면적은 5.08㎢(면내 총면적의 10.8%) 가구수는 627호 인구수는 1,744명이며 자연부락은 송당, 새터, 서부, 동부, 송동, 송서, 장구동이 있다.

노화리

규암면의 서쪽에 위치해서 북쪽으로는 야산지대를 넘어 반산저수지(九龍池)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넓은 들을 차지한 들녘에 노화리는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구룡면과 경계를 이루고 들녘에는 옛날부터 갈대가 많았던 지역으로 조선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농경지로 개간을 서두르지 않았던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면서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부락이 형성되었던 지역이다.
백제 멸망 후 사비성을 피하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이 지역 여러 곳에 마을이 생겼다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송당면(松堂面)의 지역이었다.
백제 때부터 토착민의 부락이 있었으며 백제 멸망 후부터 규암면에서는 토착하여 생활을 누리는 씨족의 집성촌도 있었던 지역으로 사료되나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그 계부가 이 지역에서 이동 또는 단절됨으로서 알 길이 없으며 고려 말기부터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새로운 세력으로 지역을 개간하여 오늘의 뿌리를 내리는 충추적 씨족으로 남은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송당면의 지역이었다.
지형이 갈고지 즉 갈고랑이처럼 생겼으므로 갈고지 또는 갈구지 또는 노화(蘆花)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홍산군 해안면(海岸面)의 지경리(地境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노화리로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1972, 1985년도 경지정리를 실시하였고 1998년 재 경지정리를 실시한 지역이다.
영농조직으로는 노화2쌀작목반28호, 노화2수박작목반10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노화리에는 부여군 농업기술센터가 위치하고 노화리는 노화1리, 노화2리로 나누며 면적은 2.82㎢ 가구 수는 184호 인구수는 441명이며 자연부락은 갈고지 이민촌이 있다.

부여두리

규암면의 남쪽에 위치해서 그 남쪽으로는 금강에 유입하는 금천이 활대대양으로 굽이쳐 흐르고 그 북쪽으로는 광막한 들이 광범위한 지역에 부여두리는 위치한다.
남쪽의 금천 가는 큰물이 지날 때마다 지형의 변화가 있었으며 부여 지역에서 농부가가 우렁찼던 지역으로도 꼽는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이전부터 인류가 정착하였으며 농경시대로 접어드는 그 시기를 꼽는다.
백제 멸망 후에는 사비성의 왕족들이 정착했다고도 전해오며 백제 멸망 후 왕족들의 비애는 부여두리와 충화면 팔충리와 함께 슬픔의 역사에 묻힌 곳이 아니었던가 한다.
고려 때에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정착했던 씨족은 고려 조선시대를 겪으면서 분산되어 그 뿌리는 이 곳에서 찾을 수 없으며 조선시대에 정착한 기계유씨(杞溪兪氏)들이 한 때 집성촌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말기에 부여군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 부여(扶餘). 홍산(鴻山). 임천(林川)의 세 고을의 경계가 되는데 이 곳에서부터 부여로 들어가는 들머리가 되므로 부여머리 또는 부여두리(扶餘頭里)라고 불렀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잉불리(仍不里)를 병합하여 부여두리(扶餘頭里)로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1985, 1986년도에 경지정리가 실시되었다.
영농조직으로는 부두양송이작목반21호, 부두수박작목반9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부여두리의 면적은 1.02㎢ 가구 수는 49호 인구수는 95명이다.
자연부락은 부여머리, 잉불(仍不), 만가대(萬家垈)가 있다.

수목리

규암면의 서북쪽에 위치해서 남쪽으로는 방대한 반산저수지(九龍池)를 앞으로 하고 서북쪽으로는 가루고개를 경계로 은산면과 접하며 낮은 야산지대에 수목리는 위치한다.
부여에서 떨어진 농촌지대이나 반산저수지가 생김에 따라 그 문화적 혜택이 빨라졌으며 고유한 풍속을 지닌 고장으로도 알려졌다.
백제 때에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부터 인류의 정착과 함께 부락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지역으로 참나무가 많은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숯이 널리 알려졌던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송당면(松堂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부터 한산이씨(韓山李氏)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들과 야산지대를 개간하면서 오늘에 이르며 그 이전에 정착에 따른 각 씨족의 분포상황은 알 수 없다.
산간지대로는 너무나 토속적인 과일나무가 많아서 감을 비롯한 대추의 생산지로도 알려졌으며 시목의 감은 한양에서도 손꼽히는 감으로 유명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송당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월학리(月鶴里). 시목리(柿木里)와 가좌면(加佐面)의 수천리(秀川里). 외경리(外敬里) 일부를 병합하여 수천(秀川)과 시목(柿木)의 이름을 따서 수목리로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1999년 규암면 내에서 가장 늦게 소규모 경지정리가 이루어진 마을이기도 하다.
영농조직으로는 수목취나물작목반23호, 수목표고작목반8호, 수목한우작목반21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수목리의 면적은 3.30㎢ 가구수는 102호 인구수는 217명이며 자연부락으로는 빼내, 시목골, 초동이 있다.

석우리

규암면의 중앙 서족에 위치해서 서쪽으로는 반산저수지(九龍池)와 면하고 있으며 반산저수지가로 이어지는 야산지대와 북쪽으로는 넓은 들을 바라보고 낮은 야산지대와 들에 석우리는 위치한다.
백제 대에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가 부여로 천도하기 전이며 부락의 형성도 그 때 이미 이루어졌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해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부여군의 송당면(松堂面)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여러 성씨가 정착하여 큰 마을을 이룬 지역이라고 구전으로 전해오나 오늘의 뿌리를 둔 가문은 없다.
조선시대 초기에 진천송씨(鎭川松氏)가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서 선비가 많은 지역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옛날부터 산세가 좋은 곳으로 낮은 야산지대이나 선비들이 따로 초막 또는 산막을 짓고 소일하던 곳으로 시조에 능한 선비가 대를 이어 전해왔다는 구전도 전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의 송당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모퉁이에 돌이 많이 있으므로 돌모루 또는 석우동(石隅洞) 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시 석우리라하여 규암면에 편입 되었다.
고적으로는 충덕사라는 사당이 있는데 충덕사(忠德詞)에는 김우항 (金宇抗)을 배향하고 또한 전주 이씨(全州李氏 ) 열녀비가 있다.
1966년과 1972년 경지정리가 실시되었고 영농조직으로는 라석 수박작목반이 조직되어20여 호가 참여하고 있으며 리의 면적은 0.88㎢ 가구 수는 98호 인구수는 243명이다.
자연부락은 돌모루, 쑥댕이가 있다.

나복리

규암면의 서북쪽에 위치해서 동쪽으로 넓은 들을 앞에 하고 서쪽으로는 잔잔한 들판에 나복리는 위치한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부터이며 취락의 형성도 그 때부터 따른 것 같다.
백제 때에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 말기에 큰 부락의 형성도 따랐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백제 사람들의 정착지 즉 사비성에서 두메를 찾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초지와 들을 개간하여 신라시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비교적 부유한 환경을 누렸던 지역이라 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군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말기부터 탐진최씨(耽津崔氏)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원주민들과 들을 개간하여 부촌을 이룩했던 지역이며 조선시대에 순천김씨(順天金氏) 담양전씨(潭陽田氏)가 집성촌을 이루며 원거 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의 지역으로서 지역이 마치 소라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나복(螺伏)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페합시 건지리(乾芝里) 월구리(月九里) 학곡리(鶴谷里) 신대리(新垈里) 일부를 병합하여 나복리라 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나복리선사유적지(羅福里先史遺蹟地), 나복리지석묘(羅福里支石墓), 김진행정려비(金鎭行旌閭碑)가 있다.
1972년 경지정리가 실시되었고 영농조직으로 라석 수박 작목반이 조직되어 20여 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으며 라복리 라복1리, 라복2리, 라복3리로 나누며 면적은 4.60㎢ 가구 수는 188호 인구수는 494명이다.
자연부락은 나복(羅福), 건지리(乾芝里), 당너머, 바낭굴, 월구리(月九里)가있다.

모리

규암면의 북쪽에 위치해서 은산면과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는 야산지대가 잔잔한 파도를 일듯 깔려 있으며 동쪽으로는 들이 넓게 펼쳐지는 지역에 모리는 위치한다.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군이 경둔리에 주둔하여 이 지역까지 출동하여 나당군과 싸운 전쟁터였다고도 전하며 그 후에는 오랫동안 산막 초막이 많은 지역이었다는 구전으로 보아 백제 사람들이 오랫동안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갔음을 짐작케 하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부락이 형성되고 부여의 외곽지대로 백제 토착민들이 오랫동안 그 맥을 유지하며 전통을 이었던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다.
토착민들이 오랫동안 전통을 이으며 생활을 누려왔던 지역이나 이 지역에 오늘의 뿌리를 내리는 집성촌은 고려시대부터 정착한 고령이씨(高靈李氏)와 조선시대 정착한 여흥민씨(驪興閔氏)의 정착으로부터 시작된 듯하다.
고려 때부터 정착하여 일시 맥이 끊긴 듯 하던 고령이씨들의 정착이 이 지역의 뿌리인 듯하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으로서 띠가 많이 났으므로 띠울 또는 모동(茅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채야리(菜野里), 함양리(咸陽里) 일부를 병합 모리라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향토문화유적으로는 임암집판각이 있고 고적으로는 모리사지가 있다 1972년 경지정리가 실시되었고 영농조직으로는 모리쌀작목반28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모리의 면적은 1.68㎢ 가구 수는 50호 인구수는 129명이다 자연부락으로는 검은머리, 띠울이 있다.

함양리

규암면의 서북쪽에 위치해서 서쪽으로는 은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은산천과 백마강이 조성한 들의 동쪽은 낮은 산맥지대로 접경을 이루는 지역에 함양리는 위치한다.
은산천의 하구에 넓게 펼쳐지는 들과 백마강으로 이어지는 지대에는 바둑판같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고 그 위쪽에 위치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 서서히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고려 초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함양리는 그 지역의 산세가 수려하여 명당자리가 많다 해서 지관들의 발길이 끈기지 않는다 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까지 토착민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으나 그 정착과정을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과 전언이 없어서 그 역사를 알 길이 없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기계유씨(杞溪兪氏)들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오늘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역이 함양리이다.
풍부한 생활적 여건에서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의 영역을 조성했던 지역으로도 알려진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의 지역이었다.
햇빛이 하루 종일 내리는 지역이라 해서 함양(咸陽)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함양리라하고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함양리고분군(咸陽里膏墳群), 함양리태봉(咸陽里胎封), 유대칭묘(劉大稱墓), 청농정터(聽農亭址)가 있다.
1972년 경지정리가 실시되었고 영농조직으로는 함양수박작목반에34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함양리의 면적은 1.68㎢ 가구 수는 80호 인구수는 192명이다.
자연부락으로는 함양, 아래뜸, 위뜸이 있다.

신성리

규암면의 서북쪽에 위치해서 은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가 하면 북쪽으로는 청양군 장평면과 경계를 이루고 낮은 산악지대와 야산 그리고 들에 차분한 정경과 함께 몇 번의 역사의 수레바퀴에 어려운 고비를 접었던 지역이 신성리이다.
백제 때는 백제부흥군의 주둔지구로 신라군과 피비린 내나는 싸움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선조 때는 이몽학이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군사를 양성하던 지역으로 반란 이후 많은 고초를 겪었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동학의 은거지로 농민들이 많은 피해를 보는 어려운 고비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였던 지역이 신성리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이전부터 일찍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비교적 일찍 부락의 형성이 따랐던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道城面)의 지역이었다.
백제 때부터 형성된 부락에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한 것은 조선시대 초기이며 이어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어 오늘의 뿌리로 등장한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중리(上中里)를 병합하여 신대(新垈)와 성산(城山)의 이름을 따서 신성리라 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신성리고분군(新城里古墳群), 증산성(甑山城), 사자봉산성(獅子峯山城)이 있고 전설로는 성재산의 남매바위가 또한 정규환(鄭珪煥) 정려비가 있다.
1994, 1996년도 경지정리가 실시된 지역이며 영농조직으로는 신성리수박작목반에20여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신성리의 면적은 3.52㎢ 가구 수는 81호 인구수는 180명이다.
자연부락으로는 강시울, 새터, 성재, 아랫강시울, 윗강시울, 중뜸이 있다.

금암리

동쪽으로는 지천(之川)이 흘러내리고 남쪽으로는 옥천산(玉泉山) 이 접경을 이루며 서남쪽으로 판점을 이으는 그 북쪽으로 지천에 접한 지역에 넓은 들을 차지한 지역에 금암리는 위치한다.
지천이 흐르면서 호우가 내릴 때마다 금암리 북쪽에는 지형의 변화가 따른 듯 광막한 들이 펼쳐져 있어서 전망이 확 트인 지역이 금암리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때 동쪽 지천과 금강이 합류하는 지점 동남쪽으로 천정대(天政臺)가 있어서 그 서북쪽에 위치한 금암리는 군마가 주둔하고 백제 군사들의 요람지가 아니었던가 한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면서 사비성을 지키는 외곽성을 구축할 때 북쪽에 위치한 두윤산성(豆尹山城)으로 통하는 큰 길이 있었으며 이어서 불교의 차원에서 여러 곳에 잔재해 가는 절의 건립과 함께 많은 중들이 오가는 큰 길도 있었다고 전해온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놓인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道城面)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예천임씨(醴泉林氏)가 정착 집성촌을 이루면서 전에 토착한 성씨들과 함께 지역을 개간하고 농경지를 조성한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道城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장주리(長州里), 금사리(金沙里)를 병합하여 금사와 돌고개에서 이름을 따 금암리라 하고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문화재로는 금암리오층석탑(金岩里五層石塔)이 있고 고적으로는 포천석교비(浦川石橋碑)가있고 또한 유진춘(柳震春)의 정려비가 있다.
1999년 경지정리가 실시되었고 영농조직으로는 금암리쌀작목반16호, 금암리수박작목반이11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금암리는 금암1리, 금암2리로 나누며 면적은 2.57㎢ 가구수는 82호 인구수는 196명이다.
자연부락으로는 금사(金沙), 돌고개, 안장주, 바깥장주, 장주(長州)가 있다.

호암리

규암면의 동북쪽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지천(之川)이 남쪽으로 들이 펼쳐지며 서쪽으로는 옥천산(玉泉山) 아래쪽으로 펼쳐지는 야산지대와 들을 경계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면적을 차지한 지역이 호암리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에는 인류의 정착은 따르지 않았으나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에는 천정대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목이었으나 부락의 형성은 백제 멸망 후로 추정한다.
고려 때에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道城面) 의 지역이었다.
신라 때부터 부락의 형성은 따랐으나 금강변의 잦은 범람과 지형의 변화로 정착민이 오래 뿌리를 내리지 않았으며 고려시대 공민왕 때에 예천임씨(醴川林氏)가 정착하면서 들을 개간과 함께 농경지 조성에 힘쓰며 집성촌으로 새로운 부락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호암리의 뿌리로 대를 이으며 30여호가 거주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의 지역으로서 뒷산에 범바위가 있으므로 범바위 또는 호암(虎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상호암리(上虎岩里), 하호암리(下虎岩里)를 병합하여 호암리라 해서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문화재로는 천정대(天政臺), 호암사지(虎岩寺址)가 있고 전설로는 천정대의 임금바위 신하바위가 있다 영농조직으로는 호암리쌀작목반에15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호암리의 면적은 2.56㎢ 가구수는 39호 인구수는 100명이다.
자연부락으로는 범바위가 있다.

합정리

규암면의 북쪽에 위치한 옥천산(玉泉山) 주변을 판점을 찍듯이 산이 절경을 이루고 그 남쪽으로는 들이 야산과 혼합하여 농경지를 조성하는 지역에 합정리는 위치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부락을 형성한 것으로 추측되는 합정리는 그래도 북쪽과 남쪽으로 드나드는 길과 백제의 군마가 자주 지나갔다는 구전으로 보아 사람들의 발자국은 오래 전부터 서린 지역 같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道誠面)의 지역이었다.
백제 멸망 후 많은 씨족이 정착하여 초지를 개간하는 등 정착민이 많았으나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씨족의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조선시대에 문화유씨(文化柳氏)가 정착하여 한 때는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이 고장의 뿌리로 전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道城面)의 지역으로서 큰 우물이 있어 온 마을이 한 우물을 먹으므로 한우물, 합우물 또는 합정(合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수답리(水沓里), 신대리(新垈里)를 병합하여 합정리라 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합정리에는 200여년된 느티나무가 있다.
영농조직으로는 합정표고작목반에6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2000년 한국전통문화학교가 개교하였고 1993년 100만평 규모의 백제역사재현단지의 지반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합정리의 면적은 2.93㎢ 가구 수는 98호 인구수는 209명이다.
자연부락은 무논골, 새터, 합우물이 있다.

신리

규암면의 동북쪽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부소산을 앞으로 하며 백마강 건너에 신리는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낮은 야산지대가 구름모양으로 깔려있으며 서쪽으로는 들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면서 백제궁중에서 건립한 왕흥사(王興寺)가 이 곳에 있으며 왕과 왕족들이 불공을 드리러 자주 드나들었던 지역이라 한다.
또한 백제 멸망 후에는 도무재 즉 울성산성(蔚城山城)에서 백제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백제부흥군들이 나당군에 저항하다가 그 해 11월 5일에 신라왕 무열왕(武烈王)이 이끄는 신라군과 접전 끝에 7일간 성을 사수하며 싸우다가 모두 전사한 백제군의 처참했던 도무재성터가 이 곳에 있다.
고려 때에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道城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초기부터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기 시작하여 현재도 70여호가 그 뿌리를 잇고 있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의 지역으로서 마을이 새로 많이 생기므로 새말, 신촌이라 부르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신구암리(新九岩里), 진변리(津邊里) 일부를 병합하여 신리라 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문화재로는 왕흥사지(王興寺址)가 있고 고적으로는 신리고분군(新里古墳群), 청간사지(淸澗寺址), 도무재산성, 청용사(淸龍寺)가 있다.
1972년 경지정리가 실시된 지역으로 영농조직으로는 신리쌀작목반25호, 신리수박작목반11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신리의 면적은 2.56㎢ 가구 수는 92호 인구수는 251명이 거주한다.
자연부락은 새말, 왕안이, 욧골, 중리, 청간절이 있다.

오수리

규암면 북쪽에 산악지대를 이룬 그 한복판에 위치해서 남쪽으로 길게 들을 조성한 지역에 오수리는 위치한다.
남쪽의 오수리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금강물이 범람할 때 북쪽에서 떠내려 와서 떠 있다는 부산(浮山)이 보이고 부여의 부소산과 구드래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지역이 오수리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에 인류가 정착한 지역이며 부락의 형성도 그 때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오수리의 남쪽은 금강이 범람할 때 마다 지형의 변화가 있었던 지역이며 오수리의 남쪽 깊숙한 곳까지 물이 들어와 백사장을 이루는 듯하여 농경지로는 부적당한 지역이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道城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전주이씨(全州李氏), 제주고씨(濟州高氏), 인동장씨(仁同張氏)가 정착하여 대단위 부락형성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고 파평윤씨(坡平尹氏)도 집성촌을 이룬다.
조선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오곡리(午谷里), 신리(新里), 수원리(水原里), 진변리(津邊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오곡(午谷)과 수원(水原)의 이름을 따서 오수리라 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개교한 백강초등학교가 이 마을에 위치한다.
1972년 경지정리를 실시하였고 영농조직으로는 오수리 쌀작목반 20호, 수박작목반 7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1999년 백제역사재현단지 편입지 이주민을 위한 53호의 문화마을이 조성되었다.
오수리의 면적은 1.96㎢ 가구수는 142호 인구수는 317명이 거주한다.
자연부락으로는 수원터, 오곡리(午谷里), 용추골이 있다.

진변리

남쪽으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북동쪽으로부터 서쪽까지 바둑판같은 전답이 놓여있는 지역에 진변리는 위치한다.
남쪽에 자리한 부산(浮山)은 전설에 따르면 큰비가 오고 금강물이 범람하였을 때 북쪽으로부터 떠 내려와서 이곳에 떠있게 되었다는 지역이다.
그리고 부산의 신령한 사람이 살아서 날아다니며 일산(日山)과 오산(烏山)의 신령한 사람과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산으로 백제말기까지 구드래를 앞에 두고 영산으로 알려져 신성시하는 지역이었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이전부터 인류의 정착이 있었으며 부락의 형성도 이미 그 때 이루어졌었다 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道城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제주고씨(濟州高氏)이어 완산이씨(完山李氏) 영월신씨(寧越辛氏)가 정착하였다고 전하나 현재는 영월신씨가 맥을 있고 있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의 지역으로서 나루의 가가 되므로 나룻가 또는 진변(津邊)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수원리(水原里) 일부를 병합하여 진변리라 해서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문화재로는 부산각서석(浮山刻書石), 백강동매(白江冬梅), 대재각(大哉閣)이 있고 고적으로는 부산산성(浮山山城), 부산서원(浮山書院), 청룡사지(淸龍寺址), 환문암지(喚文庵址),가 있으며 또한 가림조씨(嘉林趙氏)∙연일정씨(延日鄭氏)정려가 있다.
1972년 경지정리가 실시되었으며 영농조직으로는 진변리쌀작목반24호 진변표고작목반7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진변리의 면적은 1.46㎢ 가구 수는 96호 인구수는 225명이다.
자연부락으로는 백강, 진변, 말미가 있다.